(水野 勝成)
1651년 3월 15일 병사 88세.
1565년 ~ 1651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섬기지만, 뛰쳐나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등을 섬긴다. 1598년에 토쿠가와가(家)에 복귀,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오오가키(大垣)성(城) 공략에 참가,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 夏の陣)에서는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 등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카츠나리(勝成)라는 인물
미즈노 카츠나리의 부친인 소우베에 타다시게(総兵衛 忠重)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모친인 오다이(於大)의 동생이다. 따라서 카츠나리는 이에야스와는 외사촌지간이다.
카츠나리는 토우쥬로우(藤十郎)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청년시대에 부친 타다시게와 싸우고 집을 나가, 15년간에 걸친 방랑 끝에,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를 목전에 앞두고, 그제서야 이에야스의 주선으로 부친 타다시게와 화해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23일, 부친 이즈미노카미(和泉守) 타다시게가 미카와(三河)의 치리후(池鯉鮒)에서 카가노에 야하치로우(加賀江 弥八郎)에게 죽음을 당했기에, 그 뒤를 이어 미카와 카리야(刈谷) 3만석의 성주(城主)가 되었다.
그 뒤, 오오가키 성 공략,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 夏の陣),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大坂 冬の陣) 에서 무공(이 당시 아들 카츠토시의 진영에는 미야모토 무사시(宮本 武蔵)가 속해 있었다고 한다 – 역자 주)을 세워, 1615년 7월 19일에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 6만석의 성주가 되었고, 계속해서 4년 후인 1619년 7월 15일, 빙고(備後)-아키(安芸) 49만 8천석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카이에키(改易 –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마사노리의 경우는 카와나카지마(川中島) 4만 5천석으로 줄었다. - 역자 주)로 인해, 빙고 후쿠야마(福山)성주가 되었다. 영지(領地)는 빙고국(国) 남부(南部) 7군(郡) 및 빗츄우(備中)국(国) 오다(小田)군(郡), 시츠키(後月)군(郡)을 합쳐 10만석이었다.
이후, 미즈노 카츠나리는 후쿠야마에 새로운 성을 축성과 성 밑 마을(城下町)의 형성 및 영지 경영에 힘 썼다.
가독(家督)을 장남 카츠토시(勝俊)에게 물려준 것은 1639년 윤 11월 16일, 휴우가노카미(日向守) 카츠나리 76세, 미마사카노카미(美作守) 카츠토시 42세였다.
시마바라(島原) 출진
카츠나리가 마지막으로 전쟁터로 나간 것은, 그가 군칸(軍監 – 군사(軍事)를 감독하는 직책 또는 사람 – 역자 주)이 되어 시마바라 농민 반란을 토벌하러 출진했을 때이다.
바쿠후(幕府)의 명령을 받아, 아들 미마사카노카미 카츠토시, 손자 이오리(伊織 = 후에 3대 번주(藩主) 카츠사다(勝貞) – 역자 주) 이하 총 6천3백44명의 장병을 이끌고 빙고 토모노츠(鞆津)를 출항한 것이 1638년 2월 8일이었다.
2월 23일 히젠(肥前) 아리마(有馬)에 도착한 후, 다음 날 24일에는 군사회의에 출석하여,
“이제와서 뭘 맘 편히 회의 같은 것을 하는가? 곧바로 군을 움직여 무조건 공격해서, 성을 함락시켜야만 한다!”
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 때문에 여러 장수들은 26일을 총공격의 날로 정했지만, 하필이면 그 날 밤부터 비가 내려 26일 정오까지 계속 내렸기에, 실제로 공격을 개시한 것은 다음 날인 27일이 되었다.
이 때 오니휴우가(鬼日向 = 용맹과감한 무장이나, 남들이 세우지 못한 공적을 올린 맹장의 이름이나 관도명(미카와노카미나 휴우가노키미 같은 것) 등에 오니(鬼)라는 글자가 붙었다 – 역자 주) 카츠나리가 이끄는 빙고의 군세는 나베시마 카츠시게(鍋島 勝茂 = 나베시마 나오시게(直茂)의 적남(嫡男) – 역자 주)의 사가(佐賀)군(軍)과 치열한 선봉싸움을 하여, 미즈노가(家)의 전사자는 106명, 부상자는 382명이었다고 한다.
농민군이 농성하는 하라(原)성은 27일과 28일, 이틀간에 걸친 총공격에 의해 함락되었지만, 바쿠후군(軍)의 전사자 1127명, 부상자 7800명에 비해, 3월 2일 참수된 농민군의 목은 남녀 합쳐 37000명이었다.
임무를 끝낸 카츠나리가 히젠 시마바라의 코우지로(神代)항에서 바닷길로, 빙고 토모노츠로 귀환한 것은 3월 18일이었다.
영지 개발에 힘 쓴 여생(餘生)
카츠나리는 1639년 9월 9일, 에도(江戶)성(城)에서 쇼우군(将軍) 이에미츠(家光)을 알현하여, 노령으로 인해 은거의 뜻을 밝혀, 허락을 받은 후, 다음해인 1640년 1월 3일에 마지막으로 이에미츠를 알현한 후에 빙고 후쿠야마로 돌아왔다.
원래대로라면 은거한 몸이기에, 글이나 그림, 골동품 수집에 몰두하겠지만, 그의 머리 속에는 시마바라 농민 반란군들의 참수당한 불쌍한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기독교 반란이라고 하지만, 실은 영주의 가렴주구로 인해 생긴 실정(失政)의 희생양이었다.
실제로 걷어 들일 수 있는 것이 4만석에 지나지 않는 영토를 가진 시마바라 성주 마츠쿠라씨(松倉氏 = 선대(先代)는 츠츠이(筒井)가(家)의 우콘사콘(右近左近) 중 우콘인 마츠쿠라 시게노부(松倉 重信) – 역자 주)가 10만석이라고 보고하였고, 또한 바쿠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러 공사를 자청하여(영지의 수입에 맞게 부역이 내려졌지만, 시마바라번은 배 이상 부역을 자청했다. – 역자 주) 생긴 재정적인 구멍을 농민들에게서 긁어 모았기 때문에 이러한 큰 난리가 난 것이다.
그리하여 카츠나리는, 정치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영지 개발과 산업 발달에 의한 백성 생활의 향상]임을 깨닫고, 남은 여생을 하천의 치수공사와 신전(新田) 조성에 받쳤다.
그는 이런 영지 개발에 가노(家老 – 번의 수상(首相) 격인 인물 – 역자 주)인 코바 효우자에몬(木場 兵左衛門)과 나카야마 게키(中山 外記), 칸야 지부(神谷 冶部) 등의 유능한 부하를 행정관으로 등용함과 동시에 진두지휘하였고, 공사를 할 때는 각 마을에서 매일 2000~3000명이나 농민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하루 쌀 2.7Kg씩 인건비를 지급했다.
이 사업은 카츠나리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어, 그가 빙고에 들어왔을 때인 1619년에 10만석이었던 것에 비해, 그 후인 79년 지난 1698년 미즈노가(家)가 카이에키(5대 번주 카츠미네(勝岑)가 2살의 나이로 죽어, 후계자 단절로 인한 것이었다. – 역자 주)당했을 때는 13만2천3백석으로 증가하였다.
은거 후, 소우큐우(宗休)라는 호(號)를 칭한 카츠나리가 이 세상을 떠난 것은, 1651년 3월 15일.
향년 8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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